li_in 2020. 8. 11. 20:51

 

 

 엄평산은 종완의 눈 밑에 옅게 깔린 그늘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종완은 그것을 알아채고 눈을 치켜떴다.

 “왜요?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엄평산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들고 있는 반 사발 쯤 되는 약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그때 얌전히 욱왕부에 계셨더라면 평생 먹고 살 걱정도 없고 이제 와서 몸이 이렇게 망가지지도 않았을 텐데…….”

 

 종완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네요.”

 종완은 선종심이 고쳐 준 여우털옷을 당겨 걸쳤다. 그는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충분히 잘 지내요. 그들은…….”

 

 “난 타고나기를 천해서, 좋은 날을 보낼 수 없어요”

 

 엄평산은 종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어 반박하려 했다. 종완은 그런 얘기를 가장 귀찮아하여 몸을 일으켜 말했다.

 “뭐 좀 물어볼게요.”

 

 엄평산이 말했다.

 “뭘요?”

 

 종완은 침상에서 내려와 화로 앞에 앉아 화롯불 위로 손은 내밀며 무심히 말했다.

 “엄숙부, 왕야의 육친이 몇 명이지요? 영왕을 말하는 겁니다.”

 

 엄평산은 그리 명확히 알지 못했다.

 “왕야의 육친이라니, 그리 많지는 않지요?”

 

 영왕은 황족 출신이니, 그의 혈육은 경내에 널려 있을 것이었다. 궁중에 사는 그 사람들은 고사하고 부득불 따지자면 아마 어느 명문 세가와도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제 말은……왕야의 집안에서 말입니다.”

 종완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상경 한 번 하는 데에도 불편한데 다음은 어느 시절이 될지 모르겠으니, 병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을 피해 조금씩 움직여 어느 집이 넉넉하지 못하고 지원하는지 알아보아야지요. 선서들이 그런 일을 하기에는 면이 서지 않지만 나는 무방하지 않습니까.”

 

 엄평산이 생각해도 그러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정말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찾아갈 만한 친척이 어디 있겠습니까?”

 엄평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의 외가인 종부는 몇 년 전에 일찍이 몰락했고, 애당초 그렇게 큰 힘을 들여서야 겨우겨우 찾아낸 친척이 도련님인데, 다른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종완은 눈썹을 찡그렸다.

 “서너 명의 혈육이라.”

 

 친척으로 따지자면 엄평산이 말하는 것도 틀리지는 않았다. 종완도 종씨이기는 했으니. 하지만 본가인 종부에서는 일찍이 떨어져 나왔으므로 그와 영왕은 같은 혈족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해에 연루되지 않고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다.

 

 종완 자신은 영왕이 말한 그 서너 명의 혈육이 아니었다.

 

 엄평산으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으니 종완은 방도가 없었다. 잠시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아파 다시 누웠다.

 

 종완은 어렸을 때에 비해 몸이 많이 나빠졌다. 당시에는 형부 감옥에서 번갈아 가며 엄중한 심문을 석 달이나 받고, 나온 후에는 매일 풍 집사와 지혜와 용기를 겨루었지만,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한잠 푹 자면 아무 문제 없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작은 풍한이라도 한번 들면 예닐곱 날이나 끌어서야 완전히 좋아졌다.

 

 종완이 병중에 들면 검안왕부는 문을 닫고 방문객을 사절하였는데, 대외적으로는 검안왕 선서가 병이 났다고만 했다. 지금은 그가 이미 다 나았고 선서도 계속 아픈 체하기 힘드니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다행히 검안왕부에 왕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선서가 그래도 대처해 오긴 했지만, 함부로 대처할 수 없으니 피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피했다.

 

 “하지만 이건 피할 수 없지.”

 종완은 방금 막 황명을 전하러 온 소태감을 잘 보낸 참이었다.

 “황후 마마께서 내일 아가씨를 만나려 해.”

  

 선서는 큰 적수라도 만난 듯 불안해했다.

 “황후께서는……종심을 봐서 뭘 하려는 거지?”

 

 “만나보지 못했으니 보고 싶었나?”

 종완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황명을 전하러 온 소공공에게 물으니 단지 아가씨를 만나려는 것만은 아니었어. 내일 적지 않은 왕비 시아버지는 그녀를 만날 뿐만 아니라, 내일 많은 왕비와 군주가 입궁할 터인데, 아가씨 같은 왕족도 있을 것이고, 분명……연말이니 전부 만나게 되겠지.”

 

 선서는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나?”

 

 “그러지 않는 게 좋아.”

 종완이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황후는 일처리가 주도면밀해. 지금 칭병한다 해도 황후는 십중팔구 의사와 약을 내릴 거야. 병이 나으면 감사를 드리러 가야 하지 않겠어? 황후가 만일 또 그녀를 상기해 낸다면 다시 불러내지 않을까?”

 

 종완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가서 그녀를 따로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내일 혼재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나아. 걱정하지 마, 내일 내가 바래다줄 테니까.”

 

 선서는 종완이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어찌할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종완은 직접 선종심을 데리고 입궁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종완은 일찌감치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선종심의 가마 앞에 가서 몇 마디를 당부했는데, 선종심은 오히려 그녀의 두 형제보다 덤덤하여 가마 속에서 대답하면서도 종완을 빨리 마차로 돌아가게 하였고, 또 춥다고 느끼면 죽어라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라고 분부했다.

 

 종완은 웃으며 소매 속 염낭을 더듬어 보고는 선종심을 안내하는 내시에게 뇌물을 주려 다가갔다.

 

 종완이 입을 떼기도 전에, 내시가 몸을 굽혀 정중히 말했다.

 “종 도련님도 함께 입궁하시지요. 성상께서 만나보고자 하십니다.”

 

 종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번에 선서와 선유가 입궁하면서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 선유가 돌아와 있었다고 했는데, 선유가 돌아와서 하나 빠짐없이 종완에게 말했었다. 종완도 숭안제가 안심하지 못하고 자신을 만나 몇 마디 주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종완은 그에게 절하는 내시를 일으키고, 손에 든 염낭을 상대방의 수중으로 밀어넣으며 담담히 미소했다.

 “우리 아가씨는 처음 입궁하는 것이라, 예의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공공께서 잘 보살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궁중에서의 십 년은 하루와 같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종완은 익숙한 문과 익숙한 길을 따라 숭안제의 앞으로 인도되었다.

 

 난각 안, 구룡향로가 조용히 맑은 향기를 가느다랗게 내뱉고 있었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휘장 뒤 숭안제가 침상에 앉아 한창 상소를 보고 있었다.

 

 종완이 무릎을 꿇고 절했다.

 

 숭안제의 명을 받은 내시가 휘장을 걷었다.

 

 잠시간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선서 선유와는 별일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었으나, 뜨뜻미지근한 배려 몇 마디도 종완에게 하자니 아무리 숭안제라 해도 많은 말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요 몇 년, 그런대로 지낼 만했느냐?”

 

 종완은 꿇어앉아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들지 않고 잠시 동안 숭안제의 말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새겼다. 숭안제는 허울 좋은 상투적인 말을 하지 않으니, 종완도 그에 따라야 했다. 종완은 잠시 생각하고는 낮은 소리로 답했다.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처음에는 남쪽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것도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경중으로 돌아오면서 오히려 북방의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데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왕부 사람들이 위아래 할 것 없이 앓고 있습니다.”

 

 숭안제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너는 어려서부터 여기에서 자랐는데 익숙해지지 못했단 말이냐?”

 

 종완이 말했다.

 “익숙해지지 못했습니다. 남방으로 간 뒤로 여러 차례 병을 앓아 몸이 허약해진 탓에 추위를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 해…….”

 숭안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물었다.

 “지금, 아직도 노적에 있느냐?”

 

 종완은 고개를 숙였다.

 “예.”

 

 당년 종 도련님의 풍모를 떠올리니, 숭안제는 스스로도 우스꽝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해보니 내려가라 한 뒤에, 네, 네 매매 증서는…….”

 

 숭안제는 생각하고는 물었다.

 “자유에게 있지 않느냐?”

 

 종완은 멈칫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도 오늘 입궁할 것이니, 그가 오면 내 너에게 돌려주라 하마.”

 숭안제는 한숨 내쉬고는 말했다.

 “노적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후에는……검안에서 다니기에도 편할 것이다.”

 

 지금은 총애에 놀란 척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숭안제를 비꼬는 것이었다. 종완은 시선을 아래로 드리우고 미온적으로 답했다.

 “성상께 감사드립니다.”

 

 숭안제는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자 종완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 태부가…….”

 숭안제가 불쑥 말했다.

 “네가 간 이듬해에 숨을 거두었는데, 알고 있느냐?”

 

 사금(史今), 사 노태부가 죽은 뒤, 1년 동안 검안에서 수효[각주:1]했던 종완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러나 종완은 고개를 저었다.

 “검안으로 이어지는 길이 멀어 안팎의 기별이 통하지 않으니, 노태부께서 돌아가신 지 한참이 되어서야 부고를 받았습니다. 여러 날을……슬퍼하였지요.”

 

 숭안제는 종완을 바라보며 그가 한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가늠했다.

 

 숭안제가 말했다.

 “사 태부가……너를 몹시 아꼈는데”

 

 종완은 심호흡을 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숭안제는 서탁에 기대어 옛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사금이 가기 전 짐에게 말하기를……귀원은 타고나기를 총명하여 응당 계수나무 가지를 꺾고[각주:2] 천하에 이름을 날렸어야 했는데, 그때 연루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이라 했지.”

 

 종완이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숭안제는 계속해서 말했다.

 “귀원은 어려서 어려움을 겪고 요 몇 년 동안 고생이 너무 많으니, 장래에 한두가지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성상께서 이 놈의 팔자가 사납기 그지없는 것이라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사 하였다.”

  

 종완은 입술을 약간 떨고 있었는데, 그는 숭안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몸을 숙여 이마를 손등에 가져다 댔다. 몸을 다시 세웠을 때, 표정은 이미 평소와 같았다.

 

 마치 은혜에 감사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숭안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없으면, 가보거라.”

 숭안제는 기력이 떨어진 채 손을 내저었다.

 “장서각 안에 사금이 남긴 필사본과 서화 몇몇이 아직 있으니 네가 원한다면 가서 한두 가지 골라 출궁하라.”

 

 종완은 고개 숙여 절하고 몸을 일으켜 내시를 따라 나왔다.

 

 종완은 눈썹을 문지르며, 어린 시절 사금에 의해 집안에 갇혀 글을 쓰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담담하게 웃었다.

 

 내시가 종완을 데리고 장서각 편전으로 들어가서, 그를 안쪽에 있는 한 서가 앞으로 이끌고는 말했다.

 “사 태부가 생전에 필사한 것들은 대부분 여기에 놓아두었습니다. 다만 아랫것들이 글자를 알지 못하고 급하게 찾아낸 것이라 이것들이 노 태부의 것이 맞는지 정확하지 않으니,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종 도련님께서 알아서 골라내야 할 듯 합니다.”

 

 종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묵은 책들이 한곳에 쌓여, 금방 정리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내시는 인계한 후 곧바로 물러갔다. 종완은 서가 앞으로 걸어가 한 권씩 펼쳐보았다. 사 태부의 필사본을 모두 가져갈 작정이었다.

 

 종완은 한 권 한 권을 훑어보았고, 앞에 있는 서가 두 개를 한 번 훑어 겨우 두세 권을 골라내었다. 그는 시큰거리는 눈을 비비고 장서각의 더 안쪽으로 가서 막 한 권을 들자, 돌연 뒤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가 돌아서기도 전에 한 사람에게 허리를 끌어안겼다. 허리춤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종완은 그 사람의 품 안에 부딪혔다.

 

 종완은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욱사…….

 

 종완이 발버둥을 치니, 욱사의 팔에 순식간에 힘이 들어가 그를 바짝 죄어 가두었다.

 

 욱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매매 증서가 필요해?”

 

 종완은 잠시 멈추고는, 설명하지 않았다.

 

 욱사는 아예 종완을 서가에 밀어붙이고는 물었다.

 “급해? 나와 더 이상 관계되고 싶지 않은 거야?”

 

 욱사의 숨결이 종완이 귓가에 스치자 종완은 귀가 빨개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놔……다른 사람이 보면, 나는 기쁘지만, 넌 평생 씻을 수 없을 거야!”

 

 욱사는 잠시 멍해졌다가 비웃었다.

 “또 이런 수작을……내가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어?”

 

 욱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황상께 어떻게 아뢰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종완은 무심결에 물었다.

 “어떻게?”

 

 욱사는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안 준다고 했어.”

 

 종완은 욱사가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어 말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다가 서가에 부딪혔다. 서가가 흔들리고, 몇 권의 책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끄러워.”

 욱사는 단단히 종완을 끌어안고는 미소지었다.

 “계속 소란스럽게 해봐. 난 체면을 잃는게 두렵지 않으니.”

 

 


 

  1. 상을 당해 상복을 벗기 전까지 오락과 교제를 끊고 애도를 표하는 것 [본문으로]
  2. 과거에 급제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