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9 제 8장 엄평산은 종완의 눈 밑에 옅게 깔린 그늘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종완은 그것을 알아채고 눈을 치켜떴다. “왜요?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엄평산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들고 있는 반 사발 쯤 되는 약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그때 얌전히 욱왕부에 계셨더라면 평생 먹고 살 걱정도 없고 이제 와서 몸이 이렇게 망가지지도 않았을 텐데…….” 종완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네요.” 종완은 선종심이 고쳐 준 여우털옷을 당겨 걸쳤다. 그는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충분히 잘 지내요. 그들은…….” “난 타고나기를 천해서, 좋은 날을 보낼 수 없어요” 엄평산은 종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어 반박하려 했다. 종완은 그런 얘기를 가장 귀찮.. 2020. 8. 11. 제 7장 종완이 적반하장으로 나오기 전에 풍 집사는 먼저 벌떡 일어나 종완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부르르 떨며 더듬거렸다. “그, 그가……제 어머니를 한담 거리 삼고……노래를 부르면서……제게 무덤에 가라고, 삼 개월입니다!!! 저……저 벽이 그렇게 높습니까! 그렇게 높습니까!!” “…….” 이게 무슨 소리인가? 풍 집사는 마침내 소주인을 모셔와 일심으로 고해바치려 하였으나, 밤낮으로 종일 뛰어다닌 데다 지치고 화가 나 이미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공교롭게도 그는 또 초조해해서 하늘에 대고 한마디 땅에 대고 한마디 하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욱사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소년 욱사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돌봐준 노련하고 신중한 풍 집사를 당황스럽게 쳐다보며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 2020. 7. 15. 제 6장 임사는 종완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그의 심사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조금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종완을 보며 수화를 했다. [주인께서는 욱 소왕야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굳이 욱사의 출신을 영왕의 신상에 갖다 대면서 자신을 설득해서 남으려는 것인가? 종완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영왕이 당년 모함당한 것에 욱왕이 힘을 썼을 것이니 종완이 욱사에게 마음을 써서는 안 되었다. 임사는 생각하고는 손짓했다. [일이 났을 때, 욱 소왕야는 겨우 열 몇 살이었고 그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니 주인께서는 왕야께 죄송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종완은 미간을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나도 분명히 알고 있어.” 임사도 당시 욱왕부에 사들여졌었지만, 줄곧 중문.. 2020. 7. 6. 제 5장 종완이 검안왕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은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은 까닭에 저택의 대부분은 여전히 깨어있었고 마차가 길 어귀를 막 돌았을 무렵 누군가가 마중을 나왔다. 검안왕부의 하인은 욱왕부의 어가를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마주 보았다. “괜, 괜찮아…….” 종완은 차에서 내렸다. 그는 전신이 힘이 없어 가복 한명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으로 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가서 왕야와……두 소주인께 나는 괜찮다고 고하거라.” 옆에 있던 가복이 서둘러 대답하며 말을 전하러 뛰어 들어갔다. 종완은 의식이 흐려지고 자신이 눈을 감으면 먼저 깨어나지 못할까 봐 다시 정신력을 짜내어 말했다. “내가 깨기 전에는 저택의 문을 닫고 객을 물리라고 엄숙부께 가서 알리고, 그에게……벙어리를 불러.. 2020. 6. 6. 제 4장 종완은 일순 자신의 꿈이 아직 깨지 않은 줄 알았다. 욱자유는 많이 자랐고 미간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소년 시절 미간에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던 그 우수는 난폭한 기운으로 변해 이 영준한 얼굴에 다분히 음험하고 흉악한 기운을 더했다. 종완은 속으로 내가 이것이 잠이 깬 것인지 아닌지 생각했다. 만일 잠에서 깬 것이라면 어떻게 욱자유를 만난 것인지, 만일 꿈을 꾸는 것이라면……어떻게 이 사람을 이렇게 뚜렷하게 볼 수 있을까. 종완은 열이 올라 두 귀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나고 머릿속이 흐렸으며, 일어서려고 몸부림쳤으나 얼어붙은 양 손발은 마치 납이 든 것 같았다. 그는 약하게 한숨을 쉬고 가마에 몸을 지탱했으나 여전히 제대로 서지 못했고, 힘을 쓰지 못하는 두 다리는 약해서 그대로 넘어졌다. 종완은 눈 덮인 .. 2020. 6. 5. 제 3장 “만수절 뒤에, 나와 함께 검안으로 돌아가자.” 곧 도성에 들어가게 되니 종완은 임사에게 분부했다. “끝내지 못한 일이 있으면 미리 처리해둬.” 임사는 멍해졌다가 손짓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경중에 남아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종완은 고개를 저었다. “선서와 선유를 본 후 황상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것이고 네가 남아있어도 별로 필요하지 않을 테니 우리랑 돌아가는 게 나아. 이후에는 하늘 높고 바다 넓을 것이니 나를 따라 편안히 살아.” 임사의 반박을 기다리지 않고 종완은 다시 말했다. “너도 말했지만, 욱사는 옛정을 생각하지 않아. 그가 지난번에는 너를 눈감아 주었다지만 다음은? 사황자와 오황자가 혹여 맞서게 될 수도 있어. 오황자는 욱왕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사황자라고 해서.. 2020. 6. 4. 제 2장 “성정이 크게 변했다고…….” 종완이 작은 소리로 한차례 반복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홉 살 공주를 아내로 요구한 이 일은 그다지 그가 할 것 같지는 않은 짓이었다. 임사는 종완이 잘 들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한 시진만 지나면 성으로 들어갈 것이었고, 임사는 곧 가야하니 종완은 감히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마음속의 의심과 염려를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려 임사의 ‘말’을 들었다. 임사가 글을 썼다. [연초, 삼황자가 또 한바탕 병이 나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삼황자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고, 올해에 서른넷이 되어도 대를 이을 아들 하나 없으니, 태의원의 의사들은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몇 년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종완은 눈살을 찌푸렸.. 2020. 6. 3. 제 1장 종완이 재채기를 했다. “가을에 들어섰으니, 종 도련님 감기에 걸리신 거 아닙니까?” 안채에서 이곳의 지현(知县)이 성심성의껏 예의를 다하며 말했다. “종 도련님이 매일 관부 안팎을 위해 수고하시니 본인의 건강에 유의하셔야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오곡잡량을 먹으니 어찌 병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종 도련님이 처음 검안에 오셨을 때 풍토가 맞지 않아 1년은 족히 앓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추분이 지나가고 한로가 오니…….” 지현의 문장이 장황하게 보양의 길을 논하기 시작하자 종완은 저절로 넋을 놓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기 그지없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꼬박 반주향이 지나고 난 후에야, 종완은 비로소 지현 나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소관은 오랫동안.. 2020. 6. 2. 서장_쐐기(楔子) 검안왕부(黔安王府) 밖의 대로에는 앞뒤로 열 몇 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종복들은 모퉁이에서 문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바쁘게 짐을 들어 수레에 실었다. 길 건너 주점에서 몇 사람이 머리를 내밀고 기웃거리며 수군거렸다. “어인 일이지? 왕야 댁에서 무얼 하는 거야?” “석 달만 더 있으면 만수절이니, 왕야 댁의 주인 몇 분이 상경하여 생신을 축하하러 간다 들었소.” “그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가?” “허튼소리! 생신을 축하하고 나서 돌아오지 않으면 뭐하겠어?!” “만수절이 해마다 있는데 어째서 올해는 간다는 거지?”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일하러나 가!” 주점의 주인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손뼉을 한 번씩 쳐서 사람을 몰아내고, 웃으면서 손수 손님에게 차를 따랐다. “대접이 변변치 못합니다.” .. 2020. 6. 1.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