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사는 가만히 앉아서 자연스러운 신색으로 종완이 화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들었다.
민간 화본은 아무리 잘 썼다 해도 두 사람 앞에서는 조금 조잡하여 글이 조리가 없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종완은 읽을 때에 즉석해서 고칠 수 있었다. 다만 욱 소왕야가 훑어본 것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진작에 한 글자 한 구절을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가 교정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그에 비교해 종완은 그야말로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앞면은 개의치 않고 뒷면에 다다르자 종완은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믿고 문장을 좀 많이 생략했다. 재차 앞뒤를 가다듬고는 사기행각을 벌이는 망상을 했다.
애석하게도 욱사를 속일 수는 없었다.
욱사는 차를 음미하면서 그를 멈췄다.
“한 구절을 빠뜨렸어……돌아가서 다시 읽어.”
“…….”
“그곳에는 늦가을 나뭇잎의 서리처럼 얇은 옷자락만이 보였고, 희미한 달빛 한 겹만이 내려앉아 종 경은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그는…….”
종완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눈을 뜨고 계속해서 읽었다.
“종 경 그는……그는…….”
욱사는 여유롭게 종완을 바라보았다. 안저에는 익살스러움과 희롱조가 얼마간 깔려있었다.
종완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책을 탁상에 내던졌다.
“그는 읽고 싶지 않습니다!”
욱사는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종완은 귀가 살짝 빨개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넌 예전엔……분명 아무것도 몰랐는데…….”
“나중엔 다 알게 되었지.”
욱사는 한참을 웃다가 멈추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너는 이미 떠났지.”
종완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아쉽다니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욱사는 화본을 집어 들고 종완이 내던지며 생긴 표지의 접힌 흔적을 쓸어 바르게 폈다.
“재밌지?”
종완은 이를 악물었다.
“재밌, 어.”
욱사는 웃음 지었다.
“그럼 나중에 내가 더 보내줄게.”
종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혹시 더 있어?”
욱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욱왕부의 서재에 있는 십여개의 서궤가 모두 너와 나에 대한 화본인데, 이 책보다 더 재밌는 것도 많아.”
“…….”
욱사의 눈에 한 줄기 어두운 빛이 스쳤다.
“이 책보다……원색적인 것도 많고.”
“욱 왕야께서는…….”
종완은 믿기 어려운 듯이 욱사를 쳐다보았다.
“어르신께서 자신의 부중 서재가 모두 자기 아들과 외간 남자의 화본으로 차 있는 걸 알고 계셔?”
욱사는 유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계시지.”
종완은 힘들게 말을 이었다.
“널……때려 죽이지는 않고?”
욱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내게 손을 올리신 적은 없어.”
종완은 단념하지 않았다.
“공주께서는? 황상께서는?”
욱사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나에게 간섭하지 않아.”
종완은 중얼였다.
“그래 보인다…….”
욱사는 얼굴의 웃음기를 점차 지우며 말했다.
“그저 화본을 좀 소장했을 뿐이지 다른 건 하지 않았어. 그들은 나를 잘 알고 있고, 결코 내게 너무 많이 신경 쓰지 않을 거야……다들 나를 한가하게 만들면 할 일이 없어 언짢아지는 걸 잘 알고 있거든……더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종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컨대 숭안제를 아뢰러 가서 네 세자위를 빼앗아 달라고 요구한다던가 말이지. 또 예를 들면 북부 변경에 군을 이끌고 가겠다고 자청하여 욱왕부와 숭안제의 관계를 미묘하게 불안하게 만든다던가.
종완은 복잡한 표정으로 욱사를 바라보았다. 요 몇 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넌 멀쩡한 걸…….”
종완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못하는 거야?”
욱사는 시선을 들어올려 종완을 바라보며 일소(一笑)했다.
“못해.”
종완이 왜냐고 재차 묻기도 전에 욱사가 다시 말했다.
“내가 말했지……난 단지 모두를 괴롭게 하고 싶을 뿐이야.”
“이 책 너한테 줄게.”
욱사는 갑자기 축객령을 내렸다.
“가봐.”
종완은 서두르지 않았는데,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사 노태부의 필사본을 챙겨 잘 싸안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 태부가…….”
욱사가 종완을 바라보았다.
종완이 말했다.
“노태부가……너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
욱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늙은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그걸 일찍부터 내게 숨기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게 뭐라고 했어?”
종완은 시선을 아래로 드리웠다.
“자유는 욱 왕야와 달리 본성이 선량하다 했어.”
욱사는 대단히 하찮은 것을 대하듯 했다.
“언제 말한 건데?”
이는 종완이 회시를 치르기 전 사금의 저택에 잠시 머문 시절, 우연히 사금과 욱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사금이 한 말이었다.
종완은 실제 사정은 슬쩍 감추고 남몰래 손에 땀을 쥐며 도박을 했다.
“내가 검안에 갔던 첫해, 태부가 내게 보낸 서신에 언급된 거야.”
욱사는 가타부타 말없이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렇구나……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종완은 확신을 얻었다. 자신이 경중을 떠난 첫해에 욱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
장서각을 나온 후, 선종심도 막 내시를 따라 나온 참이라 두 사람은 함께 검안왕부로 돌아갔다.
서재에서 종완은 화본을 집어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떠난 첫해, 경중은 분명히 모든 것이 평안하기 그지없었는데 욱사가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그로 인해 성정이 크게 변할 만큼?
혹은……그가 무슨 일을 알게 된 건가?
그의 출신이 정말로 떠도는 말대로 좀 수상쩍은 부분이 있는데 그때 공교롭게도 그가 속사정을 알게 된 걸까?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 그가 정말 숭안제의 사생아라고 해도 그걸로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을까?
지금의 욱사는 미쳐서 아무도 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한다. 이 ‘아무도’에는 욱 왕야도 포함된다.
욱 왕야는 그를 친자식과 같이 대하는데, 남의 자식을 대신 키우면 본디 재수가 없다더니, 왜 이런 식으로 욱사에게 보복을 당해야 하는가?
종완은 7년 전의 욱사가 분명히 자신의 부왕을 공경하고 안국 공주에게도 효성스러웠던 것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종완은 화본을 들고 뒤적거렸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멀쩡하던 자유가……도대체 왜?
“그때 내가 그렇게 스스로 화를 자초해도 그를 미치게 하지 않았는데…….”
종완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이……그때 무슨 일이 있어야 살기가 싫어서 한식산을 먹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 거지…….”
같은 시각 욱 왕부의 별원에서는, 창가의 귀비탑에 기대어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회랑에 붙어있는 새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1
“세자.”
풍 집사는 여우 모포를 들고 와서 욱사의 다리를 덮어 주었다.
“바깥 날씨가 차니 잠시 있다 창문을 닫겠습니다.”
“급할 것 없어.”
욱사가 분부했다.
“책 두 권을 가져다 줘, 선반 위의 아무거나.”
선반 위의 그 책들을 떠올린 풍 집사는 치통이 느껴졌으나 성실히 가지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가지고 오자, 욱사는 손을 들어 받아들고는 말했다.
“궁에서 또 종완을 봤어.”
풍 집사는 안색이 일변했다. 그에게 ‘종완’ 두 글자로 말할 것 같으면 흉악한 시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욱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는 씩 웃었다.
“걱정 마……예전보다 많이 얌전해졌으니까.”
욱사는 손에 든 화본의 표지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마나 크게 바라보고 정세를 살피는지, 내게 반나절이나 희롱당했는데……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모두 참더라니까.”
풍 집사는 귀가 좋지 않은 척 ‘희롱’ 두 글자를 못들은 체 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그건 좋지 않습니까? 다 큰 어른인데 어린 시절과 같을 수는 없지요.”
풍 집사는 욱사의 의중을 헤아리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말하자면, 어릴 적의 소문에 구애받지 않던 모습이 호감을 샀었는데, 오히려……재미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욱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똑같이 재밌어.”
풍 집사는 어물거리며 속으로 말했다. 종 도련님, 저는 도와드렸습니다.
욱사가 휘파람을 불자 창밖의 새들이 덩달아 지저귐에 잠시 웃으며 말했다.
“종완이 우리 부에 온지 반년 쯤 되었을 때, 한 번 그와 내기를 해서 진 적이 있는데……알다시피,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그와 무슨 놀이를 하든 모두 그에게 쩔쩔맸지. 내가 졌으니, 그를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게 해주기로 했어.”
욱사는 창밖의 장설(大雪)을 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성 서쪽의 진보재(珍宝斋)로 갔는데, 공교롭게도 사 노태부의 아들을 마주쳤지. 그 아버지보다 더 융통성 없는 사 소공자 사굉 말이야.”
“사굉은 종완을 보고는 버럭 화를 내며 혹독하게 그를 추궁했어…….”
“분명히 이미 공명을 얻고 어전에 자리를 얻었을 터인데, 영왕을 위해 죄를 뒤집을 수 없는 것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영왕의 양자로서 영왕께 길러주신 큰 은혜를 받았는데, 영왕이 죽은 후에도 상복을 입지 아니하고 얼굴에 애도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불충이고 불효이다.”
“영왕의 유고들이 지금 종일을 불안에 떠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의형으로서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는 것은 배은망덕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원수의 아들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다.”
사굉의 그 쩌렁쩌렁한 질책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너와 같은 인간이……얼굴을 들고 구차하게 세상을 살아가다니!”
풍 집사는 이런 일이 있었던 줄 모르고 화가 나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가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한답니까?! 당시 그 상황에 종 도련님은 다 자라지도 못한 아이였는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요?! 감옥에서 머리를 부딪혀 죽겠습니까, 칼을 품고 오문으로 뛰쳐 들어가겠습니까?! 구차하게 살아남아? 그가 구차하게 살지 않았으면 영왕의 저 아이들은 어찌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 사굉이…….” 2
“나도 당시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어…….”
욱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종완은 한마디 반박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사굉에게 당부했어. 사 태부의 나이가 많으니, 큰 눈이 내리는 날에는 어르신은 뼈가 무르고 다리도 좋지 않아 조심해야 한다 했지.”
풍 집사는 믿을 수가 없어 욱사를 바라보았다.
“나중에야 나는 그날 그가 외출한 것도 영왕의 아이들 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됐어.”
욱사는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봐……그는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심의의 무게를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얌전하게 굴면서 시치미를 떼는 것도……그 고약한 버릇이 도졌거나 습관이 되어 고치지 못하는 것뿐이야.”
욱사는 책을 펴들고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그가 변하긴 무슨? 분명 아니지. 거봐……나중에 내가 그를 가도록 해도 그는 내게 즐거움을 남기지 않았어?”
풍 집사는 욱사의 손에 들려있는 《나와 세자의 사소한 몇 가지 일 我同世子的二三事》을 보며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6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6년 전, 이 별원에서 옛일을 알게 된 소년 욱사는 자신을 방 안에 가두고 사흘을 밥도 물도 입에 대지 않으며 머리를 풀어헤친 채 눈에는 핏발을 가득 세우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풍 집사는 당시 정말로 소주인이 자기 자신을 방안에 가두어 죽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달 전 소년 욱사에 의해 검안에 파견되어 종완의 상황을 살피던 하인이 돌아왔다.
풍 집사는 욱사의 침실 밖에서 반 시진 동안 문을 두드렸고 몸에 조금의 기운도 없는 욱사는 겨우 빗장을 풀어내어 문틈이 살짝 보이도록 열었다.
소년 욱사는 백지장 같은 얼굴에 입술에는 약간의 핏자국을 달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그는……어떻게 됐어?”
풍 집사는 서둘러 여정길에 지친 하인을 끌고 왔다.
하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악귀같은 모습의 욱사를 보고 겁에 질려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소년 욱사는 냉소를 터뜨리고는 다시 들을 기분이 들지 않아 몸을 돌려 문을 닫으려 했다. 풍 집사는 다급하게 하인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거라!”
하인은 벌벌 떨면서 더듬더듬 말을 하다말다 했다.
“종……종 도련님을 뵙지는 못, 했으나……종 도련님의 최근 소문을 듣, 들었습니다. 듣, 듣기로는 종 도련님이 검안에서, 사람들을 붙들고 하는 말이, 말, 말하기를…….”
풍 집사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하인을 발로 걷어찼다.
“종 도련님이 뭐라고 했단 말이냐?!”
하인이 발에 차여 땅에 넘어져 자포자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었다.
“종 도련님이 말씀하시기를! 무정무의한 욱자유가 자신을 가지고 놀다 버렸다고! 자신을 가질 수 없자 버려졌다고 했습니다!”
소년 욱사는 격노하여 몇 번 숨을 내쉰 후에 왝 하고 연일 가슴에 맺혔던 피를 토해냈다.
풍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들 두드려 주며 부러 부산을 떨며 외쳤다.
“세자께선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가는……종 도련님과의 이 일은 평생 따지지 못하실 겁니다! 그가 또 상복을 입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소과부상분을 부르면서요! 미망인의 도입부를 가져다대면서 평생을 따라다닐 걸요!”
소년 욱사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그가 정말로…….”
하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입니다!”
“이런 쯧!”
풍 집사는 뒤늦게 깨닫고 자신의 따귀를 한 대 치고는 말했다.
“무슨 소리! 세자께선 괜찮을 겁니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지요!”
“그가……그가…….”
소년 욱사는 그 까닭도 말하지 않고 ‘그가’를 반나절을 읊조리더니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이 크게 웃다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날, 소년 욱사는 밥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 다시 보름이 지나자, 그는 몸은 아주 건강해졌으나 성격이 조금씩 점차 변해갔다.
* 귀비탑(贵妃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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